베이넌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저택에 돌아오니 하늘은 어느새 노을이 깔려있었다.
“말을 모느라 수고했네. 들어가서 쉬게. 베이넌 자네도.”
마차에서 내린 후에 베이넌과 마부를 돌려보낸 나는 저택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멈춰 서고 말았다. 빗자루를 타고 노을을 배경삼아 이쪽으로 날아오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장식이 달려있는 넓은 챙 모자를 쓰고 있는 걸 보니 마녀가 분명하였다.
‘마녀가 내 저택엔 무슨 볼일이지?’
의아한 바람에 뒷짐을 지고 기다리고 있으니, 마녀가 노면에 살며시 착지하고 빗자루를 들었다. 가슴팍에는 ‘견습 마녀’ 명찰이 붙어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침 여기에 계시네요. 데하름 자작가의 테오라드 가주님 맞으시죠?”
“나를 아는가?”
“그럼요. 제가 전해드릴 편지를 받으실 분인데 몰라서야 되겠어요?”
아. 누군가 내게 마녀 일일 특송으로 편지를 보냈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마녀가 웃는 낯으로 편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요.”
“그래. 수고로웠을 텐데 이리 편지를 전해주어 고맙네.”
마녀에게 감사를 전하며 편지를 받아든 나는 일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도 그럴게 편지를 봉한 인장은 날카로운 눈매의 백조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으니까.
‘펠가로인 백작가…….’
날개를 펼친, 날카로운 눈매의 백조는 펠가로인 백작가를 상징하는 인장이다. 그곳에서 편지를 보냈다고 하면 이유가 뻔하지 않은가.
‘내가 에실리에게 보인 추태를 질책하시려는 거겠지.’
성으로 돌아간 에실리가 백작 각하에게 내 추태를 다 말해버렸다면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내 추태에 실망한 백작 각하께서 나를 꾸짖기 위해 편지를 보내신 것이리라.
나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으며 편지의 봉인을 뜯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친애하는 테오라드에게.
잘 지내고 있는가? 요즘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저택에 찾아가지 못한 점을 용서해주길 바라네.
내가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건 다름이 아니라, 내 여동생인 에실리가 자네와 만나고 온 뒤로 상태가 영 이상하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펜을 들었네.
본래 자네와 만나고 온 날의 에실리는 세상 즐거운 얼굴로 내게 여러 말들을 들려주곤 하였거든. 부끄럽게도 대부분은 자네에 대한 장점이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더란 말이지. 오히려 수심에 잠긴 것처럼 무언가에 골몰하는 행동을 보이더구나.
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어벌쩡 넘겨버리고 말이야.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내가 둘 사이의 관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그리해주고 싶으니 사양 말고 말해주게.
애정을 담아, 프레드가.』
백작 각하께서 보내신 게 아니었구나. 편지를 다 읽고 나니 안도감이 찾아든다.
다행스럽게도, 에실리가 내 추태를 함구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편지 다 읽으셨나요?”
마녀가 낭랑하게 물어온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녀가 빗자루를 허공에 띄워 앉았다.
“혹시 전해드릴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백작가에 들렀다가 퇴근할 거라서.”
“아. 그거라면 내가 집무실에 올라가서 편지 작성을…….”
“그건 안 된답니다. 노을이 지고 있어요. 마녀가 잡무를 맡는 건 달이 뜨기 전까지. 이건 황제 폐하라도 어길 수 없는, 인간과 저희 마녀가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명실공히 약조한 사실입니다.”
까다로운 마녀네. 어쩔 수 없나.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건넸다.
“작은 오해가 있었다고 말씀드리게. 조만간 성에 올라가면 에실리에게 내가 다 설명할거라고도.”
“네에. 접수받았습니다.”
싱긋 웃은 마녀가 땅을 박찬다. 후웅! 하늘 높이 떠오른 빗자루가 마녀의 몸을 지탱하며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점차 멀어지는 마녀는 마치 노을에 집어삼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엘프로 인해 일어난 해프닝이 아직까지는 작은 오해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가문의 위상을 실추시킬 거대한 문제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전에 내가 막아서야 한다.’
이 모든 원흉의 원인인 엘프를 뿌리 채 뽑아내지 않으면 나는 계속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나는 기필코 엘프를…….
아니, 악마를 사냥할 것이다.
저택으로 들어가니 하비드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은 하비드가 양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고개를 숙인다.
“복귀하셨습니까, 가주님.”
“그래.”
“미리 마중을 나가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이래저래 바빠진 터라…….”
마중이 늦었다고 이리 쩔쩔매다니. 직업윤리가 충실한 것은 마음에 들지만 나를 너무 어렵게 대하는 것 같아서 가끔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하비드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괘념치 말게. 자네가 가문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것은 내 예전부터 알던 일이니.”
“가주님…….”
감동을 머금은 눈동자에 미약한 물기가 서린다. 반응이 너무 격한 거 아닌가? 잠시 멋쩍게 있던 내가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옆으로 하비드가 따라붙는다. 나는 하비드를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처리해야 할 일이라니? 저택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 걱정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인근 교구의 성당에 이단 심판관을 파견해달라고 말을 전하고 오는 길이었으니까요.”
“……이단 심판관?”
아니, 왜?
내가 짐짓 당황한 눈치로 쳐다보자 하비드가 듬직한 미소를 지었다.
“가주님께서 전대 가주님의 석상에 소변을 본 자를 책임지고 찾아내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가문의 권한을 일부 사용해도 된다고 말씀하셨고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가문의 이름을 대어 성당의 성직자에게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빛의 신이 인간 세상에 내린 계율(戒律)을 어긴 자가 저희 저택에 있으며, 가주님께서 원하시니 이단 심판관을 파견해달라고 말입니다.”
미쳤냐고! 그 범인이 바로 네 앞에 있다고 하비드!
소리라도 악 지르고 싶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점잔을 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서 성직자가 무어라 말하던가?”
“주교께서 미사를 끝내시면 말씀을 전해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주교께서도 데하름 자작가의 선심에 보답할 생각을 가지고 있으셨다며 말을 덧붙이셨고요.”
“그럼 높은 확률로 이단 심판관이 내 저택을 찾아오겠군.”
“그렇지요. 실로 경사로운 일입니다.”
“경사로운 일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경사(庆事)가 아니라 경사(庆死)가 되게 생겼다는 게 문제지.
나는 여태 신의 교리를 어기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얼떨결에 이단으로 내몰려서 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단 심판관이라면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빛의 신만을 추종하는 광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이단 심판관에게 내 거짓말이 들통난다면…….’
노예를 시켜 아버지의 석상에 오줌을 누게 만든 것에 모자라 진실을 은폐하려고 거짓을 일삼은 이단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이후 교구에 돌아간 이단 심판관이 주교에게 내 죄목을 낱낱이 말하는 순간 나는 교단의 심판대에 오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문의 재산이 압수당하는 건 물론이고 가문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성녀께서 선처를 내리신다고 해도 가문의 위상이 끝도 없이 추락하겠지. 선망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영지민들의 시선이 한 순간에 혐오로 변할 것이다.
‘무섭다…….’
몰락 귀족의 처참한 최후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아서 식은땀이 흐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의 한 부분이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보면 꽤나 많았다.
그중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직접 엘프를 굴복시켜 오명을 벗는 것이다. 무력화시킨 엘프에게 진실을 토해내게 만든다면 나는 명명백백한 무죄가 된다.
자신감을 찾은 내가 하비드를 돌아보았다.
“자네 말이 맞네. 이단 심판관이 빛의 신을 대변하여 내 저택에 찾아와준다면 환영할 일이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한 시간 정도 예배의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떻겠나?”
“예? 기도 말입니까?”
“그래. 일과가 끝나서 먼저 쉬고 있는 사용인들과 노예들이 있을 텐데 시종장 자네가 그들을 이끌고 저택 부지의 교회당으로 가서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고 오게. 빛의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져야 이단 심판관도 수월하게 일을 진행하지 않겠나?”
“호오. 과연……!”
하비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과를 조기에 종료한 사용인들과 노예들을 불러 예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님께서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나는 집무실에서 따로 기도를 드리도록 하지.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출발해야 할 터이니 지금부터 예배를 드리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아, 그리고.”
내가 마침 생각난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주방장은 데려가지 말도록. 시장하니 집무가 끝나면 바로 식사를 해야겠네. 지금부터 요리를 하라고 전해주게.”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문을 표하지 않아 좋았다. 하비드는 내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남몰래 히죽거렸다.
‘알리바이의 완성이다.’
일과가 끝난 사용인들을 저택 밖으로 쫓아냄으로서 목격자를 없앤다. 덤으로 엘프 또한 시종장의 손에 이끌려 교회당으로 갈 테니(미천한 노예를 연기하고 있었음으로 시종장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덫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만약 ‘엘프 사냥’이 실패한다고 해도 시종장에게 ‘집무실에서 기도하다가 식사를 한 테오라드’라는 명제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엘프가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완벽한 작전이 아니던가.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저택의 중정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도중에 만난 사용인들에게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준 나는 중정의 회랑에서 십 분 정도 시간을 죽였다. 일과를 끝낸 사용인들과 엘프가 저택을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이제 됐겠지.’
시간을 가늠한 내가 회랑의 구석진 곳에 놓인 삽을 하나 들고 중정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제아무리 ‘대 마물 사냥용 병기’가 주변에 동화되어 형상 변환을 이룬다지만, 영악한 엘프가 갑자기 생긴 지형지물을 의심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거면 확실히 해야지.’
중정이 망가지는 건 안타깝지만 엘프를 단죄할 수 있다면 값싼 희생이었다.
삽을 든 내가 낮은 깊이로 땅을 판 다음 품에서 ‘대 마물 사냥용 병기’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석판을 들어 위의 버튼을 누르니 네모난 상자가 넓적한 판석으로 변모하였다.
나는 그 위에 흙을 뒤덮은 다음 고르게 평지를 다졌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땅을 팠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꼼꼼하게.
‘건방진 엘프년. 내가 당할 줄만 알았던 모양이지?’
이걸 밟고 나서 잘못했다며 눈물을 흘릴 엘프를 상상하니 도저히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나는 실없이 킬킬거리며 삽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고 집무실로 올라갔다. 여기까지 했으면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
집무실의 의자에 앉은 나는 고요한 심정으로 심판의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한 시간 뒤.
예배를 마치고 온 사용인들이 우르르 복귀하여 제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엘프 또한 마찬가지. 시종장에게 내가 식사를 하고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테니, 매도를 당하기 위해 제 방에 있는 개밥그릇을 들고 찾아올 것이 뻔했다.
식당으로 향하는 최단경로는 중정을 가로지르는 것.
그렇다면 엘프는 필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가 매설한 ‘대 마물 사냥용 병기’ 위를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순간을 노려 병기를 폭발시키면 될 일이었다.
“후우.”
심호흡을 내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얼굴만 살짝 내밀어 창밖을 살펴보자 내 예상대로 중정에 들어서는 엘프가 보였다. 양손에는 개밥그릇을 든 채였다.
꿀꺽.
나는 땀에 젖은 손으로 석판을 들어 아래쪽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오는 엘프에게 갑자기 미안한 감정이 들었으나, 여태 내가 당한 짓을 생각하면 미안함이 싹 가신다.
마음을 굳힌 내가 엘프를 응시하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마침내 엘프가 내가 매설한 병기 위에 발을 올렸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콰아앙─!
굉음을 동반한 폭발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흙먼지가 터지며, 높게 치솟아 오른 불길이 잠깐 동안 저택을 대낮으로 만든다. 이어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해치웠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자 연기가 서서히 흩어진다. 한 발 뒤늦게 개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사방으로 흩어진 연기 속에서 엘프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였다. 엘프가 입고 있는 거적대기는 윗가슴까지 타오르고 있는 반면에, 엘프의 머리칼은 물론이고 백옥과도 같은 피부는 깔끔함 그 자체였다.
더해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단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서 묘한 짜증과 당황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시발!’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긴 하지만 이렇게 멀쩡할 줄은 몰랐다.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심장이 크게 맥동하고 동공이 커진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손을 진정시킨 나는 집무 책상의 서랍을 열고 석판을 집어던진 다음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체통을 위해 귀족은 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으나 이 경우에는 무효다!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계단을 뛰듯이 내려간 다음 식당의 문을 벌컥 열고 식탁 앞에 앉았다.
‘머, 먹고 있는 척을 해야……!’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미리 준비한 요리가 식탁에 놓여 있었기에, 나는 급하게 포크를 들어 샐러드며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중간에 목이 막혀 와인까지 들이부으며 음식의 절반정도를 먹어치웠을 무렵.
똑똑─
노크소리가 더없이 서늘하게 들려왔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 안에 들어선 음식들을 모두 삼켜낸 다음 말문을 열었다.
“들어와라.”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며 엘프가 들어온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타버린 옷을 입은 엘프가 양손에 개밥그릇을 든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는 눈동자가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나는 방 안을 잠식해가는 공포를 애써 억누르며 필사의 연기를 행했다.
“옷이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대답이 없다. 나는 손수건을 품에서 꺼내 입을 닦아내는 것으로 입가에서 일어나는 미미한 경련을 가렸다. 그러나 식탁에 가려진 다리는 아까부터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
엘프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짓씹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누군가가 주인님의 중정에 못된 장난을 친 거 같아요.”
감정이 담기지 않아 무미건조한 말이 내 마음을 후벼파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체 누가 이런 장난을 친 걸까요?”
엘프의 두 눈이 사백안으로 떠진다. 뱀 앞에 내몰린 개구리의 심정이 이럴까. 나는 극도의 공포감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저 살벌한 눈동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기가 힘들다.
나는 입을 닦은 손수건을 품에 집어넣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 죄송해요.’
언젠가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드리긴 했는데 이렇게 일찍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머니도 잘 계시죠?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보고 싶네요. 아마 오늘 뵈러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님.”
서슬 퍼런 엘프의 음색에 내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지만 죽음을 상정하고 나니 마음이 명경지수(明镜止水)와 같이 고요해짐이 느껴진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거기다 나는 명문 귀족가에서 태어나 수많은 처세술을 배운 몸이 아니던가. 이따위 역경…….
아니, 이만한 역경에도 능히 활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주인님께서는…….”
엘프가 계속 말하게 뒀다가는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만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긴다는 것은 곧 나의 파멸로 이어지니 잠자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닥쳐라.”
내가 혀를 쯧 차며 식기를 든 손을 내려놓았다.
“그런 상스러운 몰골로 언제까지 내 눈앞에서 징징거릴 셈이냐. 아니면, 내 입맛을 떨어트리게 만들려는 수작인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주인님의 중정에 누군가가 장난을 쳤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서…….”
“알렸으면 꺼지면 될 것 아닌가. 노예 주제에 바라는 보상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벌쩡 거리지 말란 말이다.”
엘프의 안색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내가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 ‘범인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주방장!”
내가 크게 소리치니 식당 옆의 조리실에 있던 주방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펑퍼짐한 인상의 중년이 내게로 한달음에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그래. 식사자리에 불청객이 왔으니 자네가 쫓아내도록.”
“불청객이라 하시면…….”
엘프를 돌아본 주방장이 흠칫 놀란다. 다 타버린 옷이 아슬아슬하게 가슴을 가리고 있는 꼴이 척 보기에도 이상해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엘프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 이따금 주방장의 보조 요리사로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마음씨가 좋은 주방장이 걱정스런 눈을 하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괘, 괜찮으냐?”
주방장의 물음에 엘프가 시선을 돌린다. 그 서늘한 안광에 주방장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주방장님. 혹시 주인님이 언제부터 식사를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어투에 주방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노예의 질문에 대답해도 되겠냐고 내 의사를 묻는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주방장을 이리로 부른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하였고.
나의 허락을 받은 주방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십 분 전부터 식사를 하셨을 걸세. 내가 음식을 내온 시점이 그쯤이었으니.”
“아하. 십 분 전인가요.”
엘프의 시선이 내 앞에 놓인 접시로 향한다. 좀 전의 나는 엘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음식을 섭취했기 때문에, 지금 내 앞에 놓인 고기나 샐러드는 절반 정도가 없어진 상태였다.
십 분 전부터 식사를 했다는 증언에 신뢰도를 더해주는 것이다.
“그렇네요. 확실히 주인님은 십 분 전부터 식사를 하셨네요.”
그럼 대체 누굴까. 엘프가 어깨를 떨며 낮게 웃었다. 그 모습이 소름끼치는 바람에 나도 주방장도 한동안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일 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을 때, 웃음을 그친 엘프가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해요 주인님. 이런 몰골로 식당에 들어와서. 그 벌로서 저는 오늘 굶어야겠어요. 그게 맞는 거잖아요?”
엘프가 이렇게 완고하게 자신의 의사를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뭔지는 몰라도 정도 이상으로 화가 났다는 게 명확해보였기에 나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그, 그래. 가보도록 해라.”
“네. 편안한 저녁 식사 되세요, 주인님.”
내게 배꼽인사를 한 엘프가 식당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엘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정자세를 유지하던 나는, 엘프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목의 브로치를 잡아당기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 살았다…….’
미리 준비한 알리바이와 임기응변에 제대로 먹혀들어가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오늘 엘프의 저녁식사는 내가 되었을 테니까.
“하아…….”
몸의 긴장이 풀리니 뒤늦게 속이 역류하는 것만 같다. 입을 틀어막은 채 한동안 신음하던 내가 의자의 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
“토할 것 같네…….”
내 중얼거림에 주방장이 헛숨을 들이키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왜 그러나 싶어서 쳐다보니 이제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가주님의 입에서 토할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제 요리 실력이 얼마나 퇴보한 건지……. 며, 면목이 없습니다!”
오해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좀 더 신선한 재료를 취급하고 요리에 대한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고용을 파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저기, 주방장?”
“그렇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가주님이 만족할만한 최상의 요리를 만들어 보일 테니!”
물기어린 눈으로 결심을 굳힌 주방장이 내게 목례하고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괜한 오해를 사게 만들어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본분인 요리에 정진한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어보였다.
입맛을 쩝 다신 내가 왼손을 들어 검지에 착용한 반지를 툭 눌렀다. 엘프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웅─
반지 위에 방사된 푸른 기운이 사각형의 창을 만들어 엘프의 방을 보여준다.
어느새 방에 도착한 엘프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 누굴까.
같은 자세로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던 엘프가 신경질적으로 툭 내뱉는다. 이어 두 눈이 날카롭게 좁혀지며 미간이 패였다.
─ 누가 내 장난감을 노린 거지?
장난감? 설마 이 엘프는 중정에 마법 병기를 설치한 게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가 나를 노리고 마법 병기를 설치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걸 실수로 자신이 밟은 거고?
터무니없는 추측이었지만 내 무죄를 믿어버린 엘프에게 있어서는 꽤나 타당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간에 내가 용의자에서 제외되었으니 다행이었다.
─ 짜증나네.
쯧. 혀를 찬 엘프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매력적인 은발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흘러들어오는 달빛을 머금었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공상 속에서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엘프를 지켜보던 내가 감시 오브젝트를 꺼트렸다. 더는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날 범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건 다행이긴 한데.’
엘프의 상태가 저기압으로 변해버렸다. 엘프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는 아무래도 마주치는 빈도를 최소한으로 두는 게 좋으리라.
괜히 기분을 풀어주겠답시고 성고문을 주장했다가는 내 명줄이 끊길 수도 있었다.
‘이단 심판관이 온다고도 했고.’
그 전에 엘프에게 성고문을 했다가 목격자가 생기면 이단 심판관에게 이단의 빌미를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때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리자.
‘시종장에게 부탁해서 앞뜰 청소를 시키면 되겠지.’
집무실과 저택 앞뜰까지의 거리는 꽤나 멀었으니 나만 조심한다면 별 일 없이 며칠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대략적인 계획을 세운 내가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들었다.
‘오해를 한 거 같던데. 남김없이 먹어야 주방장도 좋아할 테니까.’
엘프 덕분에 입맛은 싹 달아났지만 남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남길 수는 없었다.
*
사흘 후.
“흠.”
주교의 명령을 받아 데하름 자작가의 저택에 파견을 나온 이단 심판관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그의 허리에는 날카로운 검 한 자루가 패용되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으리으리한 저택이군.”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저택은 방문자의 심리를 위축시킬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이 저택의 소유자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빛의 신을 모시는 이단 심판관인 함타르신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신이 아닌 일개 인간이 자본주의의 힘을 빌어 건축한 건물에 경외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청빈(淸贫)하며 정결(净洁)하고 순명(顺命)하라.’
신이 인간에게 내린 복음에 따르면 귀족들의 이 같은 사치는 신을 간접적으로 기만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이 허락되는 것은 오직 신을 모시는 성당뿐이라는 걸 이 미개한 귀족들은 알지 못하는 건가.’
빛의 신을 모시는 신자를 자처하고 있으면서 가르침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귀족들을 보면 진절머리가 난다.
함타르신은 혀를 내두르며 저택의 안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따로 방문을 예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중을 나오는 이는 없었다.
함타르신 또한 마중을 바라지는 않았기에 그 사실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신경한 눈으로 잘 전정된 앞뜰을 훑어볼 뿐이었다.
‘명성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동그랗게 전정된 관목들이 길을 따라 쭉 늘어져 있는 모습과 일정한 예고(刈高)로 잘려있는 벤트그라스 잔디를 보고 있으니 가주의 품격이 느껴질 정도였다.
앞뜰을 이렇게 훌륭하게 관리할 정도면 사용인들과 노예의 교육도 확실하게 시켜놓았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후한 대접을 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택의 입구까지 걸어가던 함타르신은 멈칫하고 말았다.
‘무어냐.’
귀가 뾰족한 묘령의 여성이 전정가위를 든 채 비싸 보이는 관목을 아무렇게나 잘라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홀린 듯 바라보던 함타르신은 여성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엘프……? 그것도 노예군.’
입고 있는 옷이 거적대기나 다름이 없는 걸 보면 노예가 분명하다. 마음을 다잡은 함타르신이 엘프를 향해 거만한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이봐.”
그러나 엘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관목을 난도질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재차 말해 봐도 대답이 없다. 마치 중대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해서 그곳에 골몰하는 사람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택의 손님이자 이단 심판관이 말을 건네는데 무시를 하다니. 그것도 신에게 버림받아 노예의 처지가 된 아종(亚种)이 말이다.
화가 솟구치는 바람에 함타르신은 엘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팔목을 붙잡고 홱 잡아당겼다.
“질문을 무시하지 말아라. 이 아종…….”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으려던 함타르신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엘프가 왜인지 소름끼치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저절로 기도문이 흘러나오고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마치 거대한 어둠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함타르신이 고통스러운 침음을 흘리며 머뭇거리고 있자, 엘프가 짧게 읊조렸다.
“놔.”
단조로운 음성에는 거부하지 못할 위압감이 서려있었다.
함타르신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턱선을 따라 아래로 뚝 떨어진다.
어째서 저택의 일개 노예가 이정도의 기세를 내뿜고 있단 말인가.
‘신이시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함타르신은 이 저택이 뭐하는 곳인가에 대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다.
소식이 없는 것은 무사히 잘 있다는 것이니, 그 자체가 곧 기쁜 소식이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에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엘프의 경우에는 예외다.
소식이 들려와도 불안하고 소식이 들려오지 않으면 배로 불안하다. 어디서 무슨 간악한 짓을 벌이고 있는지 내가 도대체 어떻게 알겠는가.
그 때문에 나는 지난 사흘간, 이따금 앞뜰로 나와 엘프가 얌전히 일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못 돌아갈 것 같았다.
“놔.”
엘프의 입에서 나온 말소리에 내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엘프가 내가 아끼는 관목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놓은 광경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저 기세며 눈빛은 까딱하면 사람을 묵사발로 만들겠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단 심판관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저택에서 살인 사건이, 그것도 이단 심판관이 죽어버리면 나는 변명의 여지없이 악마를 노예로 들인 이단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살인이 곧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을 목격해버렸는데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이단 심판관!”
목청 높여 소리치는 것으로 둘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나는 애써 태연함을 연기하며 저택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리 일찍 올 줄은 몰랐네.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나?”
하하 웃으며 말을 건네자 이단 심판관이 엘프의 손목을 놓았다. 다소 꺼림칙한 안색으로 엘프를 훑어보던 이단 심판관은 곧 내게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신의 종복을 자처하는 자가 환영을 바래서야 되겠습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오라드 데하름 가주님.”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네. 신의 이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한낱 미물에 불과할 뿐이니. 헌데 내가 자네를 무어라 부르면 되겠는가?”
“함타르신 라벨로. 편하게 함타르신이라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군. 그보다…….”
말 꼬리를 흐리며 엘프의 눈치를 살폈다. 함타르신을 사납게 노려보던 엘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싹 바꾸고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내 노예가 혹여 자네에게 무례하게 굴기라도 하였나? 아까 우연찮게 내 노예와 자네가 격정의 감정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만.”
“이런. 가주님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가주님이 거두어주신 이 어린 양은…… 제가 생각하기에 일반적인 노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함타르신의 눈동자에 의심이 한 줌 들어선다. 의심하는 것은 괜찮지만 엘프가 보는 앞에서 의심을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좋지 않다.
‘네 목숨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나도 위험해진다고……!’
속으로 절규를 내지른 내가 엘프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적안에 물기가 맺혀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죄책감이 동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함타르신의 의심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역시 이것밖에 없었다.
“이 건방진 년이!”
내가 인상을 구기며 엘프의 뺨을 후려쳤다. 짝! 턱이 돌아간 엘프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내가 재차 윽박을 내질렀다.
“감히 내 저택의 손님이자 빛의 신께서 종복으로 삼은 이단 심판관 앞에서 추태를 보였느냐? 돼먹지 못한 것도 정도껏이지! 네 년은 대체 언제까지 나를 욕보일 셈이냐!”
고개를 돌린 엘프는 한동안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게 매도의 일환이라는 걸 깨닫고는 무릎을 꿇으며 내 바짓단을 붙잡았다.
“히에엑……! 죄송해여 주인닝! 제가 잘못했어여……!”
“흥. 하등 쓸모없는 년. 이런 버러지를 비싼 값에 주고 산 내가 멍청한 놈이지.”
“죄송해여어……! 주인님의 씨앗으로 임신하는 것밖에 모르는 저능아라 죄송해여엇……!”
“……뭐?”
아니, 왜 없는 말을 지어내냐고 이 미친년아! 당황한 내가 함타르신을 돌아보자, 함타르신이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등허리에 오한이 서린다.
“함타르신 사제.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세. 소정의 오해가 생긴 모양인데…….”
“변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노예에게 이루어지는 성행위에 한해서, 정도 이상의 문란함이 아니면 종교 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니까요. 만약 저희 교단이 문란한 귀족들을 모두 잡아들였다면 제국에 귀족이 남아나질 않았을 겁니다.”
“아니. 나는 정말로…….”
“되었습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묵인해드릴 테니 노심초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가주님이 저를 저택에 부르신 이유가 따로 있을 텐데요.”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함타르신의 말대로 이단 심판관을 저택에 부른 이유(내가 부른 건 아니지만)는 따로 있었으니까.
물론 이유를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엘프가 지켜보고 있었으니 최대한 돌려 말할 수밖에.
“그렇지. 관련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데하름 자작가의 명예를 걸고 성심성의껏 도와주겠네. 말만 하시게.”
“필요한 것이라. 이번 이단 심판은 거짓말을 간파하고 진실을 토해내게 만드는 것이 끝이기에 필요한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가주님께서는 두 가지만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두 가지?”
“예. 우선 범인으로 예상되는 인원들을 한 곳에 모두 모아주시고,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십시오.”
“그런 곳이라면…….”
딱 적당한 곳이 있긴 하였다.
“선조께서 저택의 부지에 지어놓은 교회당이 있네. 고해성사를 위한 고해소 또한 준비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심문을 진행하면 어떨까 하는데.”
“오호라. 그리해주신다면 신의 종복으로서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저택 부지에 교회당을 두시다니 가주님의 선조께서는 믿음이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대대로 빛의 신을 섬기고 있으니 말일세.”
함타르신의 미소에 나 또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다만 내 바짓단을 붙잡고 있는 엘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지는 바람에, 그리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주지는 못하였다.
*
데하름 가문의 작은 교회당.
“저게 이단 심판관님인가? 칼 차고 다니는 사제는 처음 보는데.”
“그러게요. 왠지 인상이 무서운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빛의 신을 모신다니까.”
시종장이 데리고 온 사용인들이 교회당의 긴 좌석에 앉아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모두 보이는 맨 끝 좌석에 앉았는데, 엘프가 내 옆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앉았다. 덕분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저는 빛의 신을 모시는 균형의 교단에서 파견을 나온 함타르신 라벨로라고 합니다.”
교회당에 함타르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술렁거림이 멎는다. 함타르신은 좌중의 시선을 만끽하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여러분을 이리로 모신 것은 서로를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말에 거짓이 섞이면 상대에 대한 기만이니 이해를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겠지요? 그것은 빛의 신이 내리신 계율에 어긋나며 인간된 도리로서도 틀린 길이니 제가 신을 대행하여 바로잡고자 합니다.”
함타르신이 실눈을 뜨자 자애에 엄숙함이 깃든다. 그는 사용인들의 면면을 훑어보며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모두는 제가 시종장님께 말해놓은 순번에 따라 고해소에 들어와주시길 바랍니다. 다만 저지른 죄가 없어 마음이 깨끗하다면 축복을 받을 것이며, 거짓된 마음으로 삶을 더럽히고 있다면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말을 어렵게 하고 있으나 요약하자면 거짓말 치면 뒤진다는 소리였다. 뜨끔한 바람에 제멋대로 헛기침을 하고 말았으나, 다행스럽게도 함타르신은 개의치 않았다.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 있겠으니 한 분씩 입장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함타르신이 웃는 낯으로 고해소에 들어가자, 하비드가 각 잡힌 걸음걸이로 십자가 앞의 제단에 서서 종이를 펼쳤다.
“지금부터 내가 호명하는 순서대로 들어가도록 해라. 심문이 끝나면 교회당을 나가 일과를 보도록 하고. 그럼 호명하겠다. 우선 카라신! 그 다음은 말타오! 다음은 아이란…….”
하비드가 호명하는 이름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물론 저 명단에 나는 없다. 하비드가 함타르신에게 가주인 내가 범인일 리는 없다는 주장을 하였고, 함타르신은 내게 마뜩찮은 눈길을 보내더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타르신이 이곳에서 얻어나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날 아버지의 석상에 오줌을 누는 엘프를 목격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엘프 또한 자신이 그랬다고 자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매도당하는 지금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사서 재미를 망치겠는가.
결국 이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의 일도 생각해둬야 했기 때문에, 지금 나는 품속에 ‘대 마물 사냥용 병기’의 가동 석판을 숨긴 채였다.
이걸 증거품으로서 잘만 이용한다면 나는 어렵지 않게 무죄를 따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흐아암. 졸려여 주인님…….”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는 와중에 엘프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찬연한 은발이 내 어깨를 타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혹시 매도를 바라는 건가 싶어서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엘프는 정말로 졸린 것처럼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하긴 이른 아침부터 앞뜰에 나가 땡볕에서 전정 업무를 맡았으니 피곤할 만도 하였다. 내가 아끼는 관목을 제멋대로 난도질한 게 전정이 맞는가 싶지만.
동화책에서는 분명 엘프가 나무를 사랑한다고 적혀있었는데. 동화책이 잘못된 건지 이 엘프가 잘못된 건지 이제는 잘 모를 지경이다.
‘아무튼 무시하자.’
매도를 원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반응해줘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꺼내들어 독서에 빠져들었고, 그동안 엘프는 꾸벅꾸벅 졸더니 어느새 눈을 감고 수마에 빠져버렸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사용인들의 크고 작은 수다스러움에 은은하게 섞여들어간다. 그 위로, 색유리를 투과한 햇빛이 오로라처럼 사물을 물들인다. 무척이나 따뜻하며 고요하다. 실로 평화로운 전경이었다.
‘내가 원한 게 바로 이런 거였는데.’
내게 의지하는 순진한 노예와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싶었다. 눈만 뜨면 매도를 원하는 미친년이 아니라…….
억하심정이 밀려들어왔으나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노릇이다. 낮게 한숨을 내쉰 나는 책을 읽는 행위에 열중하였다.
그리 세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마지막 순번에 있던 레베라가 심문을 마치고 고해소에서 나왔다. 레베라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를 지나치더니 그대로 교회당을 나가버렸다.
‘뭐지?’
레베라는 착한 아이다. 교회당을 나가기 전에 나한테 인사를 할 법도 한데.
‘오늘 기분이 안 좋나?’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으리라. 아무튼 이단 심문이 다 끝났다면 이제 교회당에 볼 일이 없다. 내가 책을 덮은 다음 함타르신의 수고를 치하해주려는 찰나, 함타르신이 먼저 고해소를 나와 옷을 털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군요.”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텅 빈 교회당을 울린다.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온 함타르신이 검의 품멜에 손을 얹은 채 나를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노예를 이용하여 아비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모자라 거짓말까지 일삼다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어……? 뭐야? 내가 엘프를 시켜 아버지의 석상에 소변을 누게 만들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함타르신이 재차 말했다.
“이 건은 절대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겠군요. 저는 이단 심판관으로서, 당신을 이단으로 추정하여 심문을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테오라드 가주님.”
“아. 그, 그게 말이지…….”
들켰다는 생각에 내가 어깨를 흠칫 떨자 엘프가 스르르 눈을 뜬다.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돌아본 나는 엘프가 무표정 속에서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짜증나게 하네, 계속.
그것이 내가 아닌 함타르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나는 함타르신이 교회당에서 죽음을 맞이한 첫 번째 이단 심판관이 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엘프가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면 저택의 교회당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 것이었다.
명망 높은 데하름 자작가의 교회당에서 이단 심판관이 노예에게 죽다. 이 말도 안 되는 문장이 삽시간에 퍼져나가 귀부인들의 가십거리가 되게 생겼다는 말이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조상님들을 욕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몰락을 부추기는 망조가 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거기다 단순한 감정의 격돌로 인한 살인은 그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단 심판관과 엘프 사이에 빚어진 갈등을 해결할 단초가 나에게 있는가? 머릿속의 지식을 총동원해봐도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입 안만 바짝바짝 마르고 혈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그런 내 모습을 함타르신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인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스스로 지은 죄의 무거움에 짓눌리신 모양이군요. 이해는 가지만 저지른 죄에 대해 사면을 내릴 권한은 제게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단념하고 죄를 자백하십시오. 그리한다면 자애로우신 성녀 예하께서 자비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단념하면 네가 죽는다고 이 병신아!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가 함타르신에게 향했지만, 자기 확신에 차 있는 함타르신이 내 속내를 간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최대한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군.”
귀족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으면 안 된다. 만고(万古)로부터 내려온 가르침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내가 느긋하게 함타르신을 돌아보았다.
“내게 죄가 있다고 하였나? 이단 심판관.”
달라진 내 기세에 당황한 함타르신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나 물러설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함타르신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나를 마주 응시하였다.
“목격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정황상 테오라드 가주님이 범인임이 명확해졌고 말입니다.”
망할. 설마하니 목격자가 있었을 줄이야.
“누가 무엇을 목격했다는 소리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심문 과정에서 나온 모든 증언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주인 나에게도 말할 수 없다?”
“빛의 신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목격자의 신변을 지킬 것입니다. 이건 저만의 뜻이 아니라 균형의 교단 전체의 뜻임을 부디 인지하여 주시길.”
인자한 억양에 가시가 돋친다. 교단의 일에 간섭하려는 내가 아니꼽게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바라마지않는 일이었다. 나는 등 뒤편에서 쏘아지는 엘프의 시선을 느끼며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균형의 교단도 참으로 한심하게 변했군.”
함타르신이 이를 빠득 갈았다. 내게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테오라드 가주님. 발언에 대한 정당성을 제게 설명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제 소임을 다해 가주님을 종교 재판에 회부시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단지 균형의 교단의 사제인 자네가 교단의 가르침을 업신여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말을 내뱉은 것뿐이다.”
“제가, 교단의 가르침을 업신여기고 있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내가 알기로 균형의 교단은 제아무리 의심이 가는 자가 있어도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대상을 이단으로 몰지 않는다. 내 말이 틀린가?”
함타르신은 침묵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내 말에 허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헌데 자네의 행동은 대체 무엇이지? 목격자의 증언이 마치 빛의 신의 가르침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고 있지 않나? 나를 ‘이단으로 추정’해서 심문을 하겠다는 헛소리까지 내뱉고 말이다.”
“……경솔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면 다행이군.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주지.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자네의 심문에 응해줄 용의가 있네.”
엘프가 끼어들 틈을 만들면 안 된다. 나는 함타르신을 지나쳐 고해소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내 뒤편으로 함타르신이 따라붙는다.
“심문에 응하신다는 말씀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고해소에 들어가서 자네의 질문을 받겠다는 소리야. 그 편이 공정하지 않은가? 나 홀로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순 없는 일이지.”
“틀린 말은 아니십니다.”
여전히 나를 탐탁찮아하고 있었지만 한결 유해진 어투였다. 좋은 현상이다. 내 말을 맹목적으로 불신하지 않을 정도만 되어도 감지덕지였으니까.
“그럼 먼저 들어가 있겠네.”
고해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기다리자 반대편에서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해소의 중앙에 놓인 칸막이가 반대편을 가리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을 보면 함타르신이 맞았다.
“그럼 지금부터 심문을…….”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가 소리를 죽인 채 처절하게 외쳤다.
“자백하지! 노예를 시켜 아버지의 석상에 소변을 누게 만든 건 내가 맞다! 하지만 오해다! 나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
“……가주님?”
“나는 저 간악한 엘프에게 놀아나고 있네! 엘프에 의해 망석중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니 제발 저 엘프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죽어! 자네만 죽는 게 아니라 저택의 식솔들이 모조리 참살당할 수 있단 말이야!”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함타르신은 내 말의 진의를 판단하기 위해 한참이나 말을 아꼈다. 그 사실이 답답했던 내가 품에서 ‘대 마물 사냥용 병기’의 가동 석판을 꺼내 칸막이의 아래쪽 틈에 밀어 넣었다.
“이건……?”
“공국에서 최근에 개발했다는 마물 사냥용 병기의 가동 석판이다. 나는 이걸 이용해서 엘프를 무력화시키려고 하였지. 그런데 저 꼴을 봐라. 무력화는커녕 터럭만큼도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단 말이다.”
“최근에 중정에서 빛이 폭발했다는 목격자가 나온 게……?”
“마법 병기의 폭발을 목격한 사용인들이겠지.”
“흠. 가주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식솔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고요?”
그걸 말이라고.
“식솔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봤자 저택 전체에 혼란만 안겨줄 뿐이다. 노예 연기를 즐기는 엘프가 그 사실을 좋아할 것 같은가? 후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섣불리 도움을 요청했다가 엘프에게 들키는 순간 파국이요, 들키지 않아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엘프를 이길 수 없으면 파멸이니.”
“그럼 저에게만 따로 알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네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지. 교단의 힘이라면 엘프를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부탁이니 자네가 성녀님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 교단의 기사단이라면 저 엘프를 막아서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니.”
칸막이의 반대편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나를 불신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였으면 성공한 것이다.
“일단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진의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군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가주님께서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을 일삼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엘프 노예를 불러 대질 심문을 진행해야만 하겠습니다.”
“이단 심판관……!”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주님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끔 철저히 우회적인 질문을 할 터이니. 그로인해 제 마음속에 확신이 들어선다면 주교님께 이 사실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함타르신의 입장이었어도 내 말이 허황되게 들렸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니 나머지는 함타르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내가 한숨을 내쉬곤 고해소의 문을 열었다.
“엘프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