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을 나선 나는 백작가의 병사에게 범죄자 머넌의 인도를 요청한 다음 곧장 성의 입구로 향했다. 나를 마중 나온 인원들을 기다리게 만들어서야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홀에 도착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인물들 중에 펠가로인 가문의 일원은 에실리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마르한과 같은 가신 기사 몇 명과 성의 사용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테오라드 경.”
나를 발견한 에실리가 밝게 웃으며 다가온다. 그러나 미소 전면에 미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죄송해요. 프레드 오라버니는 또 어디론가 사라져서 없고, 맬던 그 돼지는 테오라드 경을 보기 싫다면서 나오지 않았어요. 언니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요. 정말이지…… 나중에 아버지한테 말해서 다 혼내야겠어요.”
그런가. 조금 섭섭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내가 펠가로인 백작가의 마중을 바랄만한 위치도 아니고.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더 마음에 들어. 에실리 네게 줄 선물이 하나 있거든.”
“선물이요?”
의문을 담은 벽안이 순진하게 깜빡거린다. 나는 주변에 엘프가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에실리가 보기 드물게 당황하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게…… 뭔가요?”
“약혼반지야. 준비가 늦어 미안하네.”
약혼반지라는 말에 에실리의 얼굴이 종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서서히 붉어진다. 평소 당차게 의견을 표시하던 때랑은 달리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웃으며 반지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하나 꺼내들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영롱하게 반짝거린다.
“왼손을 이리 줘보게.”
“괘, 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는 걸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어서.”
재차 강조하니 에실리가 긴장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내 쪽으로 잡아당긴 다음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에실리. 어제 네가 나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도 너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고 싶구나. 말해도 되겠나?”
에실리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게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다오. 너의 웃는 낯을 보는 것은 내 삶의 낙이니 말이다.”
퐁! 하고 에실리의 얼굴이 바짝 달아오른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온몸이 진동하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그, 그게, 그게에…….”
“혹시 내가 주제넘은 말이라도 한 것이냐?”
“아, 아니에요. 저어, 절대 아니에요.”
“그럼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겠느냐?”
끄덕끄덕. 에실리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좋구나.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나지.”
나는 에실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그때까지도 에실리는 목석처럼 굳어있어서,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 어쩜. 어쩜!
─ 방금 들었니? 나 미치겠어 정말.
─ 꺄아아.
나를 지켜보는 여식들의 반응도 좀 이상하였다.
*
테오라드의 마중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에실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갑자기 약혼반지라니, 약혼반지에 이어서 달콤한 고백이라니.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언젠가 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뜬금없이 건네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그게 싫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지만. 오히려 너무 기쁜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였지만…….
“흐음. 흠.”
그래도 너무 좋아해버리면 체통에 어긋난다.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혹시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심호흡을 내쉬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에실리가 전신거울 앞에 서서 미소를 한 번 지어보았다.
다음에 만날 때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달라는 테오라드의 부탁에 응하기 위해, 지금부터 조금씩 ‘예쁜 미소’를 연구할 참이었다.
‘최대한 고아하고 아름답게…….’
에실리는 귀족의 품격이 담긴 미소를 지어보려고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지만, 예기치 못한 복병이 계속해서 연습을 방해하였다.
“에헤헤…….”
거울에 비친 약혼반지를 볼 때마다, 기분이 고양되면서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기 때문이다.
성의 입구에서 나와 도개교로 진입하니 미리 대기하고 있는 사륜마차가 보였다. 그 옆에는 작은 짐마차가 하나 딸려있었는데, 말을 탄 기사 두 명이 호위하고 있는 걸 보니 범죄자 후송 마차임이 분명했다.
“나으리.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부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허리를 숙인다. 나는 짐마차에서 시선을 떼고 마부의 인도에 따라 사륜마차에 올라탔다.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마차 안에는 엘프가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순간 기분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 옆에 앉았다.
“출발하지.”
발끝으로 마차의 바닥을 툭툭 두드리니 채찍질과 함께 소탈한 말발굽 소리가 울린다. 내가 버릇처럼 책을 꺼내 펼쳤으나 엘프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건가……?’
아니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심력이 소모되는 일을 만들지 말자. 철저하게 무시하는 게 지금 시점에서는 정답이었다. 어떻게든 무시하다보면 저택에 도착할 게…….
지잉─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부담스럽다. 책을 들고 있는 손에 괜히 땀방울이 맺힌다. 대체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작정이냐, 엘프.
지이이이이잉─
이정도면 아예 대놓고 관심을 바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속해서 무시했다가는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 같았음으로, 나는 책을 덮은 다음 최대한 여상하게 엘프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나?”
“아. 그게에…….”
방금 전까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구는 꼴이 황당하다. 엘프는 우물쭈물 말을 망설이더니 뾰족한 양 귀를 아래로 내리면서 순진한 눈방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의 왼손에 처음 보는 반지가 있어서여.”
“그게 궁금했던 건가? 이건…….”
약혼반지라고 말하려던 입이 불길함에 우뚝 멈춘다. 진실을 그대로 고해바쳤다간 저택에서의 내 생활이 불지옥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소유욕인지 정복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엘프는 내가 다른 여자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꽤나 싫어하고 있었다.
그런 엘프의 면전에 대고 ‘이건 약혼반지다!’라고 말하는 것은 엘프에게 있어 ‘저를 죽여주세요!’라고 번역되어 들릴지도 모른다.
꿀꺽.
이건 명백히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진실을 말했다가는 인생이 높은 확률로 고달파진다.
거짓을 행해야 한다는 점이 내 신앙과 양심을 아프게 만들었지만,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으니 빛의 신께서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실 것이다.
“……치장을 하고 싶어서 최근에 하나 구매하였다.”
“헤에.”
붉은 눈동자에 서슬 퍼런 의구심이 서린다.
“치장을 위해서 ‘왼손 약지’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셨구나. 그렇구나. 마치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기 위해 ‘누군가’와 반지를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으음. 아무래도 제 착각인가 봐요.”
왼손 약지, 다이아몬드 반지, 누군가.
엘프가 늘어놓은 단서가 너무나도 집요해서 변명을 할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인정해버리면 거짓말을 했다는 괘씸죄가 더해지고 말 것이다. 조금은 위험한 수였지만 뻔뻔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쓰레기가. 네 주인이 뭘 하든지 무슨 상관이냐. 제멋대로 상상을 늘어놓는 것도 역겹기 그지없군.”
혀를 차며 싸늘한 낯으로 엘프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엘프는 시선을 내리면서 양 귀를 바들바들 떨었다.
“죄, 죄송해여……. 저는 지능이 암퇘지와 같아서, 주인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 잘못인줄 몰랐던 거예엿…….”
“흥. 알면 됐다. 피곤하여 눈을 좀 붙일 테니 그 저열한 입은 닫고 있지.”
“네, 네엥…….”
엘프가 시무룩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임기응변이 먹혀 다행이었다. 나중에 약혼반지임을 들키면 큰 화를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에실리와 미리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불상사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
“도착했습니다, 나으리!”
마부의 우렁찬 외침에 눈을 떴다. 비몽사몽한 느낌에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옆을 돌아보니 엘프도 마찬가지로 자고 있었다. 좌석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벽면에 머리를 기대고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피곤했던 모양이지.’
하긴 어제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그리라고 하였으니 밤을 샜을 게 분명하였다. 제아무리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존재라고는 해도 몸에 쌓인 피로는 어쩌지 못할 테니까.
깨울까 싶었으나 그만두기로 하였다. 엘프가 자고 있는 편이 내게 훨씬 좋았으니까. 나는 검지를 입에 대는 것으로 마부가 재차 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찌뿌둥한 기분으로 몇 걸음 나아가니 시종장인 하비드와 가신 기사인 베이넌이 내게 다가왔다.
“섭정의 역할을 수행하시느라 고초가 많으셨습니다, 가주님.”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은 내가 베이넌을 응시하였다.
“가문에 별 일은 없었나?”
“예? 저는 잘 모르지요. 그런 건 시종장에게 물어보셔야 마땅합니다.”
“내 말은 지난 일주일 동안 자네가 뭘 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이다.”
“저야 뭐……. 가신 기사로서 평소처럼 가문을 지켰습니다. 별 일은 없었고요.”
“탱자탱자 놀았다는 것이구나.”
양심에 찔린 것인지 베이넌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도련님. 말씀에 좀 가시가 돋친 것 같습니다?”
“전혀. 그저 데하름 가문의 유일한 가신 기사가 태평하게 잘 살아있다는 것에 빛의 신께 감사를 드릴뿐이다.”
“허 참. 따로 명령을 내리신 것이 있으셨다면 제가 관련해서 힘을 썼겠으나, 도련님께서는 별 말씀 없이 백작 각하의 성으로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로서는 억울합니다.”
“따로 명령을 내렸으면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였다?”
“예. 제 기사도를 걸고 맹세합니다.”
걸려들었구나, 베이넌. 내가 히죽거리며 뒤편의 짐마차를 가리켰다.
“그럼 지금 내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해주길 바란다. 저 짐마차에 있는 죄수를 끌어내서 하늘정원 거리의 21번 구역으로 가게. 거기 꽃집이 하나 있을 거야. 주인의 이름은 하리아. 찾아가서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물어봐라.”
“아니. 저는 가신 기사이지 잡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음? 방금 자네가 자네 입으로 말했을 텐데? 따로 명령을 내리면 착실히 수행하겠다고. 그것도 기사도를 들먹이면서 말이야.”
베이넌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덫에 걸린 맹수마냥 표정이 포악하기 그지없었으나 나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기사의 전통성을 중시하는 자네라면 기사도를 어기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만.”
어디 반박해보라는 투로 비아냥거리자 베이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어째 도련님은 갈수록 머리가 비상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낮은 한숨. 베이넌은 어쩔 수 없다는 양 짐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나와 이 범죄자 새끼야!”
화풀이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베이넌은 테오라드의 명령대로 하늘정원 거리의 21번 구역에 있는 꽃집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세 살배기 남자아이를 홀로 키우는 과부가 있었는데, 과부는 밝게 인사하다가 범죄자 ‘머넌’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보니 머넌이 자신의 남편을 죽인 자라는 걸 안 것이다. 하여 베이넌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마음이 안정된 과부는 남편이 겪은 고통을 그대로 겪게 해달라며 최대한 잔인하게 머넌을 죽여주길 부탁하였다.
덧붙여 테오라드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으면서 자신이 꽃집을 운영하며 모은 돈을 내밀었지만, 베이넌은 받지 않았다. 테오라드가 싫어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이봐!”
그리하여 숲 한복판에 마련된 너른 공터에서 단출한 처형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베이넌은 튼튼한 나뭇가지에 밧줄을 던져 넘긴 다음 아래로 끌어내렸다. 무심한 눈이 머넌을 향한다.
“왜. 할 말이라도 있나?”
“그, 그래! 날 살려주게! 그럼 내 재산이 숨겨진 곳을 말해줄 테니!”
“오호라. 어디에 있는데?”
“날 살려주면 말해주마. 정말이다!”
“그건 안 되지. 뭘 믿고 널 살려줘.”
베이넌이 밧줄을 꽉 잡아당겨 바닥에 박아놓은 말뚝에 고정시켰다.
“케헥!”
밧줄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면서 머넌의 목에 걸린 올가미가 위로 끌어당겨진다. 그러나 당장 죽지는 않게, 까치발을 들면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만 유지하였다.
팔과 다리가 묶여있는 머넌의 입장에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 위기감을 느낀 머넌이 거칠게 호흡을 토해내었다.
“그, 그럼……. 먼저 말해주면 살려줄 텐가?”
“당연하지. 내 기사도에 대고 맹세하마.”
“조, 좋아. 검은 밀밭 주점의 지하에 가면 혼자만 색이 다른 벽돌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좌로 세 번 아래로 다섯 번에 위치한 벽돌을 누르면 비밀의 방이 열린다. 거기에 내 재산을 모아놨다! 정말이다!”
꽤나 구체적이네.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까칠한 턱수염을 쓰다듬던 베이넌이 무신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돈은 잘 쓸게. 그런데 네 요구에는 응해줄 수 없어. 난 도련님한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라. 황제를 시켜준다고 해도 도련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라고.”
베이넌은 아직까지 테오라드의 아버지이자 데하름 자작가의 선대 가주인 웰리언을 기억한다. 웰리언이 죽기 전에 당부했던 말 또한.
─ 베이넌. 내 아들을 잘 보살펴주게. 심성이 고운 녀석이라 자칫 정쟁(政争)에 휘말려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자네가 좋아하는 돈은 얼마든지 주겠네.
그러나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베이넌은 그저 주군의 마지막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용병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주고 사람답게 살게 해준 사람의 마지막 청이었으니까.
물론 그걸 머넌이 알 리가 없었다.
“무, 무슨! 방금 기사도에 대고 맹세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런데 기사도를 어기는 게 내 기사도라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머넌이 당혹감에 입을 벌렸으나 베이넌은 머리를 긁적이며 뒷걸음을 칠 뿐이었다.
“불쌍해서 하나 말해주는데 까치발 들지 말고 그냥 목매달고 죽는 게 나을 거야. 여기 저녁만 되면 늑대들이 나오거든. 걔네들한테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이, 이 개 같은 사기꾼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뭐, 알아서 잘 하고. 받은 돈이 있으니 명복 정도는 빌어줄게.”
싱긋 웃은 베이넌이 말에 올라타서 옆구리를 가볍게 박찼다. 그에 풀떼기를 먹고 있던 말이 고개를 들고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간다.
“이 천벌 받을 새끼가! 어디서 너 따위가 기사라고……!”
뒤편에서 외치는 욕설이 제법 아름답게 들려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베이넌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라는 듯이 흔들었다.
베이넌을 보낸 나는 하비드와 함께 저택에 들어섰다.
하비드는 내가 자리를 비운 일주일 사이 저택에서 일어난 일(대부분이 작업장의 노예들에 관해서나 사용인들의 일처리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대해 늘어놓았다.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하비드가 말을 끝마치며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가주님께서 저택을 비우셨을 때 도착한 서신입니다.”
“그렇군.”
우두커니 멈춘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시선을 내렸다. 백작 각하에게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편지였다. 포효하는 사자의 인장으로 봉한 편지는 틀림없이 황실에서 보낸 것이다.
애써 덤덤하게 편지를 받아든 내가 봉인을 뜯고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펠가로인 백작령의 테오라드 데하름은 보아라.
팔 년 전부터 자네가 연구했다던 ‘인공 강우’ 마법에 흥미가 생겼다.
네 이론대로라면 가물이 지속되어 가뭄이 온다고 하여도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
마법이 완성된다면 농업과 수문학의 발전은 물론이고 전장에서의 승기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데 왜 삼 년 전부터 돌연 황실의 연구 지원금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이냐?
듣기로는 연구가 지지부진하여 부담감에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던데, 연구가 지지부진할수록 황실의 지원을 받아 심혈을 다하는 것이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더냐.
기후를 조작하는 것은 천기(天气)를 지배하는 일이니 심적인 부담이 심한 것은 잘 알겠으나, 끝맺음을 짓지 못하는 연구는 나태의 상징이며 황실에 대한 기만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나태한 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일주일 뒤의 오후에 황궁 소속의 마법사 몇 명과 함께 감사관을 보내겠으니 인공 강우 마법에 대한 연구 실적을 낱낱이 보고하도록 하라.
베넬리아 폰 에스테반』
아무런 미사여구가 붙지 않은 성명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베넬리아…….’
공전절후(空前绝后)하며 전무후무한 철혈의 황녀.
두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둔 황제 폐하의 막내딸이면서 동시에 황실 직할 전투부대의 군무재신(军务宰臣)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작년에 성인식을 치렀으며, 황위 계승 서열상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막내딸임에도 불구하고 대신들 사이에서 이따금 말이 나올 정도로 황실에서 제 자리를 굳건히 키워나가고 있는 거물이었다.
‘이런 사람이 왜 나를…….’
이해는 한다. 이론상 ‘인공 강우’ 마법은 완성되기만 한다면 제국 전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천혜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삼 년 전부터 황실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은 연구가 더디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공 강우는 완성될 수 없는 마법이란 말입니다.’
이상은 컸으나 재능이 뒤받쳐주지 않았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며 복잡한 마법이었으며, 연구를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실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졌다.
그래서 포기한 것이다. 황실의 지원을 받아 마법 연구를 계속한다고 해도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격이었으니까.
그런데 대뜸 연구 실적을 보고하라니? 그것도 일주일이란 촉박한 시간을 두고 말이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백작 각하가 나를 높게 평가하여 황실에 말을 전해주었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 높은 평가를 더 높게 평가하여 두 발 짐승인 나를 하늘에서 보자고 하니 답답함이 엄습한다.
“시종장.”
낮게 한숨을 내쉰 내가 편지를 품에 넣었다.
“편지가 언제 도착하였는지 알 수 있겠나?”
“정확히 나흘 전에 도착하였습니다.”
“나흘 전이라고?”
흡사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왜, 왜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았나?”
“송구합니다. 저는 다만 섭정의 역할에 힘쓰고 계신 가주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며, 편지를 전해준 마녀에게 듣기로 시급한 사항이 아니라기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사흘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하비드를 탓할 수는 없었다. 황실에서 보낸 편지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미리 읽는 것은 크게 보면 대역죄에 해당되니까.
거기다 마녀가 시급한 사항이 아니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니 하비드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탓할 사람이 없어지니 괜히 공허해지기만 한다.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머뭇거리던 내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알겠네. 말은 다 전해 들었으니 시종장은 마차로 가서 엘프 노예를 깨우고 백작 각하에게서 받은 상자를 가져오도록 하게.”
“예. 그런데 상자라고 하시면?”
“섭정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며 백작 각하께서 건네주신 금은보화네. 예산 외 수익이니 작업장의 노예들에게 값비싼 고기와 술을 베풀고 사용인들에겐 고생을 치하한다며 봉급의 삼 할 정도를 추가로 건네주게. 남은 돈은 금고에 모아놓도록.”
말을 전해들은 하비드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감돈다.
“관대한 처사이십니다. 벌써부터 사용인들과 노예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사족입니다만 몇몇 노예들은 가주님과의 계약을 통한 복무기간이 모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응? 저건 처음 듣는 소린데.
“대체 왜 자유인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소리냐?”
“저도 궁금하여 물어보니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가주님의 노예로 사는 것이 훨씬 풍족하고 여유롭다더군요. 애초에 거금을 들여 사 온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사람은 가주님밖에 없다고도 합니다.”
“여러모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삶에 있어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혹여 시종장 자네가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겠다는 걸 핍박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비드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축 내렸다.
“저는 평생을 데하름 가문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제가 감히 가주님의 명을 어기고 노예들을 수족처럼 부렸겠습니까?”
“그……. 당연히 농담이다. 나는 자네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네.”
그제야 하비드의 얼굴이 밝게 펴진다.
“정말이지 제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한량 같은 베이넌과는 달리 하비드는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너무 큰 영향을 받는 것 같아서 조금은 걱정될 정도였다.
하긴 하비드는 내 나이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문에 종사해온 사람이다. 분명 나만큼이나 가문의 번영을 바라고 있겠지.
이런 사람이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멋모르고 의심한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나는 멋쩍게 웃으려다가, 헛숨을 들이키며 한 발 뒷걸음쳤다.
“주인님.”
엘프가.
분명 마차에서 잠들어있어야 할 엘프가 복도의 모서리를 돌아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양 손에는 백작 각하에게 받은 상자를 든 채로.
“저를 안 깨우시고 혼자 가버리셔서 한참을 찾았잖아요.”
뚜벅뚜벅. 구두굽이 노면에 부딪치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다가온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자, 엘프가 서늘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백작 각하에게서 받은 소중한 상자를 놔두고 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네?”
“그, 그것이…….”
“제대로 대답해주세요. 왜 백작 각하께서 하사하신 상자를 놔두고-”
“이놈이!”
하비드가 고함을 지르며 엘프의 머리를 콩 때렸다. 움찔 멈춰 선 엘프가 고개를 돌려 하비드를 쳐다보았으나, 하비드는 얼굴을 붉히며 노성을 지를 뿐이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부라리느냐! 고명한 데하름 가문의 가주님이신 테오라드 자작님이 네년의 친구로 보이는가!”
아니. 그러지 마 할아범.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허? 이 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게도 눈을 부라리는구나. 네가 가주님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체벌을 하지 않았더니 본분을 잊어버린 모양이로다. 어디 한 번 제대로 된 훈계를 받아야 정신을 차릴 성 싶으냐!”
엘프의 이마에 격자로 힘줄이 돋아난다. 이거, 이거 진짜로 위험하다.
위기감을 느낀 내가 하비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손 때문인지 하비드가 의아함을 가지고 나를 돌아본다.
“왜 그러십니까, 가주님?”
“시종장. 너무 그러지 말게. 세상 물정 모르는 노예이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도가 넘었습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면 물정을 알려줘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잘 훈계할 터이니 가주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비드의 노기어린 시선이 다시 엘프를 향한다.
“집 한 채는 살 수 있는 값비싼 항아리를 깨트린 주제에 어디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것이냐. 천지에 너처럼 오만하고 뒤를 모르는 노예는 없을 것이다. 네가 여태 살아있는 것도 다 가주님의 배려라는 걸 정녕 모르는 것이냐?”
엘프는 대답이 없었다. 그게 하비드의 심경을 건드린 것인지, 하비드는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씩씩거렸다.
“오냐. 오늘 네 년이 죽는지 내가 죽는지 한 번 겨뤄봐야 하겠구나.”
저기, 할아범이 무조건 죽으니까 그만해.
“기어이 대답하지 않겠다 이거지? 좋다. 내 소싯적에 운동을 제법 하였는데 이번 기회에 매타작이 무엇인지 네게 알려주겠-”
꽈악. 내가 하비드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았다. 이 이상 엘프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저택에 피바람이 불 것 같아서였다.
“시종장. 이 엘프는 내가 훈계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예? 하지만 가주님…….”
“명령이네.”
명령이라 말하자 하비드가 기세를 죽이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엘프를 내려다보았다.
“시건방진 년. 너는 내가 따로 훈계를 해야겠으니 집무실에 먼저 올라가서 청소를 하고 있어라. 상자는 시종장에게 건네주고.”
“네, 네에…….”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엘프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하비드에게 상자를 건네주고는 나를 지나쳐 복도를 총총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비드가 혀를 쯧쯧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막돼먹은 년입니다. 가주님이 아니라 다른 주인을 만났으면 진즉에 생을 마감했을 터인데.”
“……맞는 말이다.”
엘프가 아니라 주인이 생을 마감했겠지.
“아무튼 나는 황실에서 내려온 명을 수행하기 위해…….”
문득 불길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엘프는 대체 언제부터 복도의 모서리에 있었던 거지? 내가 편지를 펼쳤을 때 복도의 모서리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보는 각도에 따라 내 편지를 같이 읽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옆으로 몸을 돌린 채 편지를 읽고 있었으니까.’
내가 알기로 엘프는 청력뿐만 아니라 시력 또한 인간을 초월할 정도다. 만약 황실에서 온 편지를 엘프가 같이 읽었고, 내게 매도당하기 위해 고의로 ‘실수’를 저지르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면…….
‘시발!’
생각을 마친 내가 바닥을 박차고 내달렸다. 뒤편에서 하비드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고속으로 계단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어서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내가 문을 벌컥 열자, 예상대로 엘프가 내 연구 일지를 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엘프가 순진한 표정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앗.”
일렁이는 촛불 위에 위태롭게 들려있는 연구 일지를 보자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른다.
사본이 따로 없기에 저게 없어지는 순간 황실에 진상할 연구 기록은 없어지고 만다. 침을 꿀꺽 삼킨 내가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읊조렸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둬라.”
아니, 도저히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만두라고 이 미친년아!”
감정을 담아 소리쳤지만 엘프가 그만 둘 리가 없었다. 매도당할 건수를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행하는 것이 바로 눈앞의 엘프였으니까.
그 증거로, 내가 그만두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엘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파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주, 주인님. 저, 저는 그냐앙…….”
가증스러워서 말도 안 나온다. 연구 일지를 옆으로 치우면 되는데 뭐가 힘들다고 변명을 대고 있는 거냐고!
그래도 엘프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 연구 일지가 인질로 잡혀있는 이상 경거망동해서야 내 손해였다.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킨 내가 엘프를 차분히 노려보았다.
“촛불을 끄고 연구 일지를 옆으로 치워라. 당장.”
“저도 그러고 싶어엿. 그런데 어제 그림을 하도 많이 그렸더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어…….”
지랄한다 진짜! 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연구 일지를 촛불 위까지는 어떻게 옮겼냐고!
고함이라도 왁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엘프가 깜짝 놀라버렸다는 명분으로 연구 일지를 떨어트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다 촛불이 연구 일지에 옮겨 타버린다면 그야말로 대참사.
‘……생각을 하자.’
어떻게 해야 엘프의 마수에서 연구 일지를 구해낼 수 있을까.
나는 일렁이는 촛불과 그 위편에서 위태롭게 들려있는 연구 일지를 바라보며 고뇌에 잠겼다.
‘사본이 있다고 거짓말을 할까?’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연구 일지가 실은 사본이며 원본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의욕을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한 선택이다. 혹여 엘프가 원본이 있으니 이건 태워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버리면 완벽한 자충수가 될 테니까.
‘여기서 더 화를 내버리면?’
네가 연구 일지를 태우지 않아도 나는 엄청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어필하면 어떨까. 애초에 엘프는 내게 매도를 받는 게 목적이지 연구 일지를 태우는 게 목적은 아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것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연구 일지가 내게 소중한 물건이라는 걸 깨달은 엘프가 나를 더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 방화를 결심한다면 낭패였다.
‘내가 오히려 상냥하게 굴면?’
태워도 된다는 식으로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면 엘프의 행동이 굼뜨지 않을까.
찰나의 시간을 번다면 곧장 달려가서 연구 일지를 빼앗아버리면 된다. 그도 그럴게 고작 촛불 따위다.
연구 일지를 다 태우는 것에는 시간이 꽤나 걸릴 테니 엘프의 행동을 잠시 동안만 지연시키면 되었다.
‘역시. 마지막 방법을 선택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처사는 마지막이었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은 연구 일지를 살리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잘했다.”
내가 표정을 달리하여 인자하게 웃어보이자 엘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주인님?”
“잘했다고 하였다. 그건 안 그래도 꺼내서 태울 요량이었는데 미리 찾아주었구나.”
“네?”
어? 이게 아닌가? 엘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내가 태도를 급변하니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밀고가면 될 일이다. 나는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암퇘지 같은 네년에게도 칭찬할 거리가 한두 개는 있는 것 같군. 내 수고를 덜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줄 터이니 이리로 오거라.”
“그게 무슨…….”
엘프가 질겁하며 팔을 들어올린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땅을 박찼다. 갑작스레 달려들자 엘프가 깜짝 놀라서 한 발 뒷걸음친다.
“건방진!”
나는 손을 뻗어 연구 일지를 낚아챈 후 엘프를 옆으로 밀치고 뒤로 물러났다. 읏, 하며 밀려난 엘프가 의미심장한 낯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연구일지를 펼쳐 첫 장과 끝 장까지 면밀히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불에 그을리거나 훼손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긴장이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이 맥 빠지게 흘러나온다. 동시에 엘프를 향한 모종의 분노가 마음속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너는, 나를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구나.’
이 연구 일지는 내게 있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연구 일지를 처음 작성할 때만 하여도 아버지가 살아있었기에, 나는 숱한 연구를 행하면서 이 일지를 작성하고, 그때마다 심심찮게 아버지에게 첨삭을 받았었다.
그러니 이 연구 일지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겨있는 몇 없는 물건 중에 하나란 말이다.
그걸 눈앞의 이 엘프는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태우려고 하였다. 나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역시. 나는 네가 싫다. 무척이나.’
에실리와의 관계를 방해하고 내게 매도를 강요하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물건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태우려는 것에서는 치미는 혐오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 주인님…….”
그런데도. 그렇게 심한 짓을 한 주제에 이 엘프는 내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불쌍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해버리는 바람에…….”
이가 빠득 갈린다. 우발적으로 손을 든 내가 엘프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엘프의 턱이 돌아가며 짧은 침묵이 형성된다.
엘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기도 전에, 내가 방문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꺼져라!”
그러나 엘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제 자리에서 가만히 있던 엘프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강옥을 닮은 붉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담는다. 엘프는 작게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아버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주인님…….”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엘프가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방문을 나서고,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망할.”
입술을 짓씹은 내가 연구 일지를 책상에 내려놓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엘프가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자연히 분노도 희석되어간다.
“뭐하는 거냐, 대체…….”
방금 내 행동은 매도를 위한 거짓된 분노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서 엘프의 뺨을 때리고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엘프를 집무실에서 내보내는 것에 성공하였지만 전혀 개운하지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얽인 실타래처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따라가서 사과를 해야…….’
헛된 생각을 하던 내가 안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프는 이걸 매도의 일환으로 보고 있을 테니까 사과는 필요하지 않았다. 사과를 하는 순간 화를 낼지도 모른다.
‘잘 된 거야. 오히려.’
나는 시간을 벌었고 엘프는 매도를 당했으니 서로가 승자였다. 한숨을 깊게 내쉰 내가 집무 책상에 앉아 연구 일지를 훑어보았다.
괜한 걱정으로 인해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으니까.
앞으로 사흘. 백작 각하와 베넬리아 황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연구 기록을 종합하여 황실에 진상할만한 보고서를 만들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말이다.
*
사흘이 지났다.
사흘 동안, 테오라드는 집무실에 박혀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 결벽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놈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씻지도 않고, 식사도 모조리 집무실에서만 해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다.
엘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난감 주제에.’
테오라드가 자신에게 진심을 담아 화를 내었을 때, 그때는 너무 놀라서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가버리고 말았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장난감 주제에…….’
이가 갈린다. 엘프는 짜증을 속으로 담아두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늘도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화를 낼 속셈이었음으로, 엘프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집무실의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주인님. 제가 주인님이 아끼시는 접시 세 개를 박살내서여…….”
그러나 장난을 받아줄 테오라드는 곤히 잠을 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책상 위에 엎어져서 곯아떨어진 모습이 짜증날 정도로 태평하다.
“…….”
눈살을 찌푸린 엘프가 문을 닫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홍관조가 자수된 검은 융단을 가로지른 엘프는 싸늘한 눈초리로 테오라드를 내려다보았다.
팔을 베개 삼아 옆으로 엎드려 있는 테오라드의 왼손 약지에 끼인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롱하게 반짝이는 게 보인다.
‘치장을 위한 반지라고?’
테오라드의 입에서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손가락을 분질러버릴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약혼반지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왜 요즘 들어 계속해서 기어오르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본보기삼아 지금 여기서 팔을 꺾어버릴까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아직은 아니야.’
장난감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니 단순 변심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테오라드를 잠시간 내려다보던 엘프는 마법으로 의자를 만들어 앉았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연구에 매진했던 모양인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는 테오라드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연구라고 했었나.’
연구 일지. 그걸 불태우려고 하자 화를 내던 테오라드를 기억한다.
그게 대체 무엇이기에. 궁금증이 동한 엘프는 염동을 이용하여 테오라드의 밑에 깔린 커다란 마법 화지를 스르르 꺼내들었다.
허공에서 펼쳐보자 꽤나 어설픈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법진의 이곳저곳에는 테오라드가 직접 서술한 글씨들이 엉망진창으로 널려있었다.
‘이걸 마법진이라고 그린 건가.’
어설프다 못해 답답할 정도다.
총 378개로 이루어진 회로에는 서로 맞물리지 않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허상 회로가 빈번히 보였고, 마법의 촉매 역할을 하는 각종 기호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었다.
더해 마법의 추진체 역할을 하는 17개의 문양들 중 3개의 문양이 서로 충돌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능해.’
그러나 유능해지기 위해 끝도 없이 노력한 모습이 마법진의 전면에 새겨져 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싸맨 흔적들이 엘프에게는 하나도 빠짐없이 보이고 있었다.
엘프는 변덕삼아 눈을 감아보았다. 이 마법이 완성되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를 상상하였다. 테오라드가 이 마법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세상을.
‘…….’
가뭄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머리 위로 비가 내리자, 어그러져있던 메마른 입술이 신을 찬양하며 미소를 짓는다.
갈증을 느끼던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다니며, 당장 내일 먹을 물을 걱정하던 부녀자가 밝은 얼굴로 항아리를 꺼내든다.
가뭄으로 죽어가던 마을에 하나 둘 활기가 돈다. 갈증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끊으려던 부랑자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물을 독점하는 귀족들에 대한 민초들의 분노가 가라앉고, 비싼 값에 물을 팔아 사리사육을 채우려던 악덕 상인들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과연, 시들어가는 세상에 꽃이 피었다.
이 마법이 제국 전역에 보급된다면 수많은 분쟁이 없어질 것이 명확하였다.
‘너는.’
눈을 뜬 엘프가 잠들어 있는 테오라드를 바라본다. 두 눈에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기억의 편린이 깃들어 있었다.
‘여전히 한심할 정도로 착하구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너 같이 연약한 존재는 금방 꺾이고 말 터인데.
혀를 찬 엘프가 고개를 돌려 마법진의 오류를 하나 둘 수정하기 시작했다.
테오라드의 실력으로는 십 년은 더 연구해야 완성할 수 있는 마법을, 오전이 지나기 전에 완벽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마법진의 완성을 핑계로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파지니까.
‘반항을 참아주는 건 이번 한 번 뿐이야, 테오라드.’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장난감을 수리하는 과정일 뿐이다.
움찔.
눈을 떴다가, 스르르 감았다가, 다시 떴다가…….
“……엗?”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손목으로 침을 닦아낸 내가 당황하며 거칠게 호흡을 내쉬었다.
“어, 어어?”
밝다. 집무 책상을 비추는 햇볕이 뜨거울 정도로 밝았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대개 불길한 예감은 정답인 경우가 많았다.
서둘러 벽걸이 시계를 살펴보자 시침이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으며 낮게 절규하였다.
“미친……!”
밤을 새다가 너무 졸린 나머지 새벽에 잠깐 눈을 부쳤는데, 일어나보니 감사관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망했다. 그냥 망한 것도 아니고 아주 제대로 망해버렸다. 황실에 진상할 보고서를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는데 지금 일어나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 병신!”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자책해봤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결국 반쯤 체념한 내가 책상에 팔을 괴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관한테 뭐라고 말해야…….’
시간이 없어 잠을 자지도 않고 이틀 동안이나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마지막 날에 깜빡 졸아버려서 보고서 작성을 끝마치지 못했다고 변명한들 코웃음도 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보고서는 됐으니 인공 강우 마법의 진척도를 보자고 하겠지. 그럼 나는 오류투성이의 마법 도식화를 건넬 것이고, 황실의 인원들이 보는 앞에서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데하름 가문이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베넬리아 황녀는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삼 년 전에 황실의 지원을 물리고 개인 연구를 선언한 마법을 기어이 찾아내어 완성을 종용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를 조롱거리로 만들려고? 아니. 데하름 가문 따위를 황실에서 신경 쓸 리가 없다.
베넬리아 황녀는 다만 백작 각하의 명예를 나로 하여금 실추시키려 한 것이다.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황실에 있어 소국과 마찬가지의 전력을 가진 펠가로인 가문은 눈엣가시일 테니까.
‘레오베르크 백작이 추천한 인재가 알아보니 실속이 없는 녀석이더라. 레오베르크 백작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모양이다…….’
황녀의 입에서 나올 우스갯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황녀는 정녕 정쟁(政争)의 한 부분으로 나를 이용하려고 한 것인가. 피해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가능성이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뭐가 목적이든 간에 이미 되돌릴 수 없어졌지만…….’
감사관은 올 것이고 나는 어떻게든 연구 진척을 보고해야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무 책상 위에 펼쳐놓은 마법 화지를 살핀 나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어?’
회로가, 기호가, 문양이.
마법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아무런 오류도 없이 서로 맞물리고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회로 하나를 손보면 다른 회로가 망가지기를 반복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모든 오류가 고쳐졌단 말인가?
혹시나 싶어 마법진에 손을 대고 손끝으로 미량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스스스─
퍼져나간 마나가 막힘없이 마법진 전역에 스며들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마법진을 보니 정상적으로 구동됨이 확실했다.
‘뭐야……?’
내가 몽유병이 있나? 자는 사이에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해서 하루아침에 마법진의 모든 오류를 수정한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상식적으로 볼 때 내가 자는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마법진을 수정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엘프를 뜻한다. 저택 내에서 마법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은 엘프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도와준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덕분에 망신살을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정교하게 짜인 마법진이라면 실제 마법 구현에서 실패를 겪는다고 해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으니까.
적어도 백작 각하가 나로 인해 황실에서 무시를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소리다.
똑똑─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소리. 내가 피곤을 떨쳐내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하비드가 들어온다. 조금은 긴장한 낯빛이었다.
“가주님. 제도에서 귀빈들이 오셨습니다.”
“귀빈이라 하면?”
“황궁 마법사 다섯 분과 제국 대학 마탑 소속의 로일렌 정교수님이십니다.”
대학 마탑의 정교수를 감사관으로 보냈나. 어느 정도 예상한 구성이었기에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최고급 다과를 내와 응접실에서 응대하게. 나는 간단하게 몸을 씻고 바로 내려가도록 하겠네. 이런 꼴로 황실의 사람들을 볼 수는 없으니.”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비드가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나섰다.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기에,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집무실을 나섰다.
*